사월 십구일, 산책.

2020. 4. 20. 00:41카테고리 없음

산책하면서 들은 노래


https://youtu.be/YpiNgWJ-BQ8

Nilusi (닐루시) - Amertume (쓴맛)

https://youtu.be/waJow53bh3g

Nilusi(닐루시) Au Delà (바깥)



워낙에 폰이 옛날폰 (A7)이라 카메라가 안좋기도 해서, 따로 채도와 색감을 조금 보정하기는 했다.




가벼운 니트와 긴 바지, 얇은 코트를 입고, 검은색 운동화를 신고 비닐 우산을 들고 밖으로 나섰다.


오후 두시 반. 산책하기 딱 좋은 시간.


비는 부슬부슬하게 내리고 있었다. 이따금 툭, 툭 떨어지지도, 우다다다 시끄럽게 떨어지지도, 온 몸을 끈적이게 습기로 뒤덮지도 않는


잔잔하고 서늘하고 상쾌한 전형적인 봄비였다.


집을 나서자마자 작은 언덕으로 이어지는 산길에 올라갔다. 


마스크 틈새로 들어오는 달달한 흙냄새와, 여린 새싹의 향기는 기분이 좋았지만


이따금 버려진 쓰레기들과 담배 꽁초가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하여간 한심한 족속들이다. 


그래도 산수유 나무들이 힘겹게 틔워낸 연노랑빛 꽃술을 보며 걷는 것은 나를 들뜨게 했다. 여러모로, 비닐 우산을 챙기길 잘했다.


평소의 짙은 남색의 우산이었다면 바로 머리께에 닿은 산수유 가지의 옅은 색 꽃잎을 보며 즐거이 웃을 수 없었으리라.


비닐 우산으로 가리니, 마치 유리창 너머로 보는 것 처럼 맺힌 빗방울들이 또 정취를 돋궜다. 고집을 부리길 잘했다.







그렇게 산길을 넘어 운동장을 돌아 육교로 다가가니, 화단에 저물어가는 철쭉이 있었다.


너의 봄은 어떠했느냐.


애초에 사람이 많지 않은 이 길을 수놓기 위해 심어진 너의 삶은 비참했더냐


혹은 그저 뿌리를 내릴 수 있다면 족하던가. 그리 묻고 싶었다.


3년 전만 해도 이자리에는 꽃이 없었다. 어디서 옮겨왔을까. 


누가 이리 하루종일 자동차 매연을 맡으며 켁켁대야하는 비참한 자리로 여린 생명을 옮겨왔을까 생각했다.




육교를 오르다보면, 계단의 틈마다 돋아난 민들레며, 이름모를 잡초들과 눈을 마주치게 된다.


씨를 일부러 뿌리려 해도 하지 못할 그 희미한 틈새로 어떻게 그리 생명이 자랄까. 매년 또 감탄하고 매 순간 감동하게 되는 자리.


매 발걸음마다 생명을 마주하며 육교를 건너면 비로소 공원이 나온다.



한동안 리모델링이다 뭐다 해서 공사중이어서, 발길을 끊은지 오래였기에 아주 오래간만의 방문이었다.


나의 유치원부터 고등학교 등 모든 소풍과 자율활동, 체험학습은 다 이 길로 이어졌었는데 말이다.



오랜만의 공원은 사람들을 위한 터를 모두 잔디밭으로 메꾼, 의미모를 것이 되어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친구들과 돗자리를 펴고, 도시락을 싸와 앉았던 그곳은 누런 잔디로 메워져있었다.


아쉬움인지 슬픔인지 모를 묘한 기분에 잠시간 그곳에서 서있었다.


유치원 때, 어머니가 싸주신 김밥이 한가득 든 통을 들고 고목 아래 앉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샘솟았다. 그 나무는 또 어디에 옮겨졌는지.




공원의 길을 따라가 보다보니 현충원이 나왔다.


저 위에가 현충탑이 있는데,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아래에서는 탑의 머리도 보이지 않았다.


막상 저 아래 서면, 높은 계단과 정돈된 잔디, 웅장한 돌벽이 위압감을 들게 하지만, 정작 중요한 현충탑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


나는 참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항상 볼 수 있는 자리에서 지금을 위해 희생하신 분들을 기억하고 추모할 수 있어야 하지 않나. 그런 생각. 


위엄과 웅장함보다 그런게 더 중요하지 않나. 그런 생각.


하지만 난 부천시장이 아니니까. 그러려니 하고, 잠시 멈춰 묵념을 하고 다시 걸어갔다.





현충원 옆에는 진달래 동산이 4월 30일까지 봉쇄된다는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어쩔 수 없지만.


그 아름다운 분홍빛 물결을 사랑하는 나에게는 슬픈 일이었다.


30일이면 이미 저물고도 남을 터였다. 5월에 가봤자, 이미 삶을 잃어버린 처연한 회색만 남아있겠지.




조금 공원을 돌아보다 어린이 도로주행 연습장으로 내려왔다.


다리가 살짝 아파 지붕이 있는 벤치에서 앉을 속셈이었는데, 놀이터의 의자는 이미 등산객이 차지하고 있었다.


할 수 없이 어린이용 교통 연습장까지 내려왔는데 이곳에도 벤치마다 사람이 있어 자리를 찾는데 꽤 시간이 걸렸다




유치원 때 딱 한번 아동용 자동차를 몇 백원을 넣고 타서, 이곳을 돌아다녔던 기억이 났다.


그때는 참 커보였는데.


이제는 작다. 크기만 했던, 올려다 봤었던 신호등도 어떻게 이렇게 작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만 든다.




한참을 앉아 빗소리와 음악을 감상하다가,


저 멀리 벤치에서 어르신 두 분이서 바둑을 두는걸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조용하시더니, 나중엔 언성을 높여 싸우시었다.


역시 그 세대의 e스포츠. 차가운 빗줄기도 승부에 대한 열정을 잠재우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아름다운 산.


매 부분이 다른 빛깔로, 다른 초록으로 칠해진 산은 차마 인간의 손으로 따라할 엄두가 못 날만큼 아름답다.


이런 곳에 가까이 사는 나도 참 축복받았다.




슬슬 돌아오려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막 봉우리를 틔운 라일락이 눈에 띄었다.


아쉽게도 빗방울에 향은 흩어졌는지 가까이 코를 대고 숨을 깊게 들이쉬어봐도 향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라일락 자체의 향은 코가 쎄할정도로 강하니, 어쩌면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들었다.





라일락 옆에는 영산홍이 있었다.


옅은 분홍빛, 가장 먼저 피고 지는게 진달래. 꽃잎 끝이 둥그스름하다.


철쭉은 끝이 뾰족한 편이며, 진달래보다 색이 짙다. 흰 철쭉도 있다. 진달래보다 좀 더 오래 피어있다.


영산홍은 빨간색, 짙은 분홍빛(거의 자줏빛)이 난다. 7월까지 피어있는걸 보기도 했다.


나름 진달래 공원 토박이라, 나만의 구별법이 이렇게 있긴 하지만 정확하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뭐 어떤가. 꽃은 피어남으로써 제 몫을 다했고, 나의 눈은 즐거이 꽃을 즐김으로써 제 쓰임을 다했으면 됐지.



돌아오는 길에 발견한 철쭉. 이렇게 보니 반점들이 조금 징그럽다고 느껴지지만, 


사진이라는게 다 그렇지. 직접보면 사랑스럽기 짝이 없다.




그리고 오늘의 베스트컷 (내생각)


원래 홑겹인 철쭉을 개량한 꽃이겠지. 개화시기가 좀 늦은지 이제 막 피어나고 있었다.


여린 꽃잎에 맺힌 물방울이 사랑스럽다. 




어릴적에는 진달래를 따 와 화전을 부쳐먹기도 했는데, 이제는 미세먼지 때문에 그러지 못하겠지. 애초에 진달래 동산에 들어갈 수도 없겠지만.


돌아오는 길이 그런 생각들로 어쩐지 서글퍼져서 자꾸 걸음이 느려졌었다.



자박이 깔린 빗물을 자동차가 스치고 지나가며 나는 파도소리,


우산막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


산의 정적.


그 아름다운 소리와 아름다운 향과 아름다운 꽃을 즐긴다는 것도


또 지금이 지나면 내년 봄에나 가능하겠지, 하는 생각을 하면 참 슬프다.


이 봄이 저물기 전에, 23일에 재개장 한다는 도서관을 간다는 핑계로 또 나갈까 싶다.